인류 빅뱅시대, 출항을 위한 생각 도구

2021. 1. 10. 22:11자유 게시판


인류 빅뱅시대, 출항을 위한 생각 도구 

 

 

 

 

 

 

레베카 라인하르트 - 방황의 기술

 

 

 

[Book]  -  '  방황의 기술 '

(Odysseus oder Die Kunst des Irrens)

 

 

Rebekka Reinhard

 

Odysseus oder Die Kunst des Irrens: Philosophische Anstiftung zur Neugier

Odysseus oder Die Kunst des Irrens: Philosophische Anstiftung zur Neug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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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번째 단서 :- 철학적 생각 실험 

신(神, God)이 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새벽 4시, 콘수엘라가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린다. 

전날 밤 일곱 살 먹은 사촌 여동생이 살인을 당했다. 

두 남자가 사촌 여동생의 집에 들어와 동생을 죽였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죽였단다. 

지금까지 콘수엘라는 인간의 선한 면을 믿었다. 

하지만 이젠 모르겠다.

머릿속에 수천 가지 질문이 떠돌며 대답을 찾아 헤맨다. 

기진맥진한 그녀가 결국 신(God)에게 도움을 청해본다.



  -콘수엘라 : 왜 가만두셨습니까?

  -신(God) : (침묵)


  -콘수엘라 : 하필이면 당신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지금,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신(God) 인 것은 맞긴 맞나요?

 

  -신(God) : (침묵) 


  -콘수엘라 : 다들 당신이 주인이라고 합니다. 선하고 전지전능하신 신(God)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아무 죄 없는 사촌 여동생이 죽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었는지 전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잔인한 폭력에 쓰러지도록 내버려 둘 수 있으신가요? 
  정말로 당신이 선하고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전쟁이나 질병, 자연재해 같은 나쁜 일들을 사전에 막아주시지 않는 건가요?

  -신(God) : (침묵)

  -콘수엘라 : 좋아요. 뭐, 할 수 있었다면 막아주셨겠지요. 
  당신도 못 하실 일이거나 전혀 모르고 있었나 보지요. 

  그렇지만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다면 전지하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신(God) : (침묵)

  -콘수엘라 :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인간은 고통을 겪어봐야 한다는 뜻이겠죠. 
  안 그러면 도덕도 믿음도 발전하지 못할 테니까요. 

  인간이 악을 만나지 못하도록 막아주지는 않더라도 선을 따를지 악을 따를지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거겠죠. 

  사실 저도 제가 알아서 마약 판매상이 아니라 생선 가게 주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지금 저는 사촌 여동생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를 할지 아니면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줄지 고민이에요..

  -신(God) : " 삶에 고통이 없다면, 또 각 개인이 그런 고통에 대해 나름의 입장을 선택할 수 없다면, 인간에겐 성장의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내가 창조한 세상이 최고의 세상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

  -콘수엘라 : 인간들을 조금만 더 인간적으로 만드실 순 없었나요? 
  수천 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교훈을 얻지 못하다니, 꼭 그렇게 인간을 만들었어야 하셨어요?

  -신(God) : (침묵)






 정말 신(God)이 존재한다면 왜 신(God)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시는 걸까? 

  무신론자들은 나치 수용소, 전염병, 대량 학살을 보고도 신이 침묵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신(God)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신(God)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신(God)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는다. 

신(God)이 있으므로 괜히 잘난 척해서도 안 되고, 우리가 신(God)의 침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 자만해서도 안 된다. 

신(God)은 무한하게 똑똑하기 때문에 그가 세상을 지금처럼 창조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새대가리'로는 절대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 

우리 눈으로 보면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인 것도 신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의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신론자들에게 신(God)보다 똑똑한 척한다고 비난 할 수 있다. 

신(God)을 믿는 자들에겐 우리의 이성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한다고 비난할 수 있다. 

어떤 쪽의 입장이 진리에 더 가까운지 과연 우리가 알아내게 될까?

어쩌면 신(God)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잘못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세상을 창조한, 무한한 능력을 갖춘 피안의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악마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한 번 악마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악마는 우리가 지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고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보고 분명 화를 낼 것이다. 

이렇게 끔찍한 일들을 겪고도 어떻게 여전히 선을 믿을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거꾸로 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왜 ??? 이 세상에 이렇게 나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지 고민할 것이 아니라, 왜 나쁜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닌지 고민을 해야 마땅한 것이다. 

신이 아니라 악마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가정하면, 그럼에도 우리가 행복하고 적어도 가끔씩은 선행을 한다는, 즉 악마가 전력을 다해 이를 막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어쩌면 그냥 내버려 둬도 인간은 어차피 타인의 행복에 같이 기뻐하고 타인의 용기를 모델로 삼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악마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차피 인간은 잘되는 사람을 보면 질투와 시기심에 가슴을 쥐어뜯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겐 보복을 가할 테니 말이다. 

물론 우리 중에는 주변 사람들이 눈총을 주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으며, 전쟁 지역에서 살지도, 가난하지도 않고,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니며, 자기 인생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행복이건 사랑이건 돈이건, 그리고 당연히 생명 그 자체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결국엔 잔인하게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짓을 하건 결국엔 악마가 고소해 하며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당신이 신(God)을 믿는다면 당신은 악마도 믿는가?

신(God)이나 악마는 믿지 않아도 인생의 의미 같은 건 믿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의미 있는 인생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을지 모르겠다. 

자유의지라 부르는 것을 통해 당신은 실제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모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무관심을 버리고 나쁜 짓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이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기로 결심한다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인생의 의미가 선과 미에 있다고 누가 말하는가? 

자기 인생이야말로 의미가 넘친다고 생각하는 대량 학살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

이런 고민이 너무 힘겹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비트겐슈타인이나 레비나스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단어와 설명을 찾겠다는 생각을 오래전에 버렸다면 선과 의미에의 의지를 행동을 통해 입증하라. 

그렇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딸이 있어서 당신의 고귀한 생활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논리적) 근거를 요구한다면? 

그런데도 당신은 침묵을 깨뜨리지 않아도 될까?

 

 




■ - 방황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길을 잃고 나서야, 세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위치와 우리 관계의 무한한 범위를 깨닫기 시작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과 10년에 걸친 방랑을 끝내고 마침내 이타카의 해변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고향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테나가 섬을 짙은 안개로 감싸버렸던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워낙 오랫동안 집을 비우다 보니 그사이 고향도 참 많이도 변했다. 

  오디세우스가 외지로 나가 잇는 동안에 그가 죽었을 것이라고 믿은 120명의 제후들이 왕궁을 점령하였다. 

  모두가 과부가 된 페넬로페와 결혼하여 왕좌에 앉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은 왕비는 오랜 세월 그들의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점점 난폭해지자 궁지에 몰린 그녀는 꾀를 냈다.  오디세우스의 연로하신 아버지에게 수의를 짜서 드려야겠으니 그때까지만 참아 달라는 것이었다. 

  3년 동안 그녀는 매일 수의를 짰고 밤이 되면 다시 짠 만큼 실을 풀어 시간을 벌었다.  그 사이 구혼자들은 오디세우스의 왕궁에서 먹고 마시며 돼지를 잡고 하녀들과 놀아났다.

  따라서 일단 질서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적들에게 발각당하게 하지 않기 위해 아테나는 오디세우스를 늙고 힘없는 거지로 변신하였다. 

  처음에는 충견 아르고스 만이 그를 알아보았지만, 늙은 유모 역시 흉터를 보고 오디세우스를 알아보았다. 

  다시 오디세우스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아들은 아버지와 힘을 합하여 적들을 물리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아내 페넬로페에게는 아직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페넬로페가 마침내 시합을 열었다. 

  오디세우스의 활을 당겨, 한 줄로 늘어놓은 도끼머리 12개의 구멍을 통과시키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말이다.  다들 달려들어 시합에 응했지만 오디세우스의 활조차 잡아당기지 못했다.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직접 나서서 활을 집어 들었고 보란 듯이 잡아당겨 힘껏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12개의 구멍을 모두 통과하였고, 이어 구혼자들에게 가서 박혔다. 

  창과 칼로 무장한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도와 적들을 모두 무찔렀다.  궁정은 피바다가 되었고 구혼자들은 전멸하였다.

  하지만 원래의 모습대로 자기 앞에 선 오디세우스를 보고도 페넬로페는 의심을 풀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그 남자가 자신의 남편인지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하녀를 불러 주인이 돌아오셨으니 오디세우스의 침대를 옮겨놓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웃으며 하녀를 불러 침대는 뿌리가 있는 거대한 올리브 나무둥치를 잘라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므로 쪼개지 않으면 옮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이야말로 여전히 낯선 그 남자가 정말로 오디세우스라는 증거였다.  너무 기뻐 울음을 터뜨리던 순간 페넬로페의 방랑도 끝이 났다. 

오랜 세월 불확실의 바다를 헤매던 세월이 비로소 다 지나갔다.  그녀 역시 20년 만에 처음으로 육지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오디세우스는 예전과 같은 사람이면서도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같으면서 동시에 다르다. 오랜 방황 끝에 천신만고 돌아온 새 사람이었던 것이다.  

  집을 떠나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20년의 혹독한 세월이 흘렀고, 그 세월은 친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친숙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혼란의 세월 내내 그를 이끈 것은 자신의 뿌리인 고향과 가족, 아내와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관계를 결코 잊은 적이 없기에 그는 미지의 세상과 위험을 이겨내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방황의 기술을 모범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우리와는 정반대다. 

  안전 의식, 자아도취, 도덕적 상대주의, 상상력 결핍을 통해 우리는 일체의 방황을 시간 낭비로 여기며, 돌아오는 것 없는 실수로 치부하고, 불확실한 상태에 머무르는 법을, 예상할 수 없는 것, 불명확한 것을 견디고, 나아가 그것들을 호기심을 갖고 긍정하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빠르고 안전하게 A에서 B로 가는 길은 수없이 많지만, 만병 통치약을 준다는 전문가들은 넘쳐나지만 대신에 우리들은 방향을 잃는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처럼 그 방향 상실을 미지의 것을 탐구하고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로 전혀 활용하지 못한다.  아니 방향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나는 누구지?', '무엇 때문에 살지?' 이런 의문이 솟구치지만, 대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이런 의문의 의미를 깨닫게 된 후에야 비로소 사실과 숫자만 들어 있는 우리의 여행 가방이 너무 빈약하다는 느낌이 어슴푸레 밀려온다.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은 오디세우스의 침대처럼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요즘엔 아무도 어떤 가치를 위해, 어떤 동경을 위해 살아야 할지 말해주는 이가 없기 때문에, 어디가 고향이고 무엇이 고향인지, 어디로 돌아가서 무엇과 관련을 맺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도 무척 힘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이유는 없다. 

 오스트리아 작가이자 철학자 로베르트 무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삭막함, 우리의 기계화, 타산성, 무신앙심에 대한 한탄이 바다가 되어 넘쳐흘렀다. (..)  다들 타락을 치유해야 한다고 믿는다. (..)  나는 이런 현재를 타락이 아니라 문제로, 새로운 문제로 해석하는 설명을 거의 알지 못한다. (..)  '

  자신이기도 한 새로운 것을 이해하지 못한 한 시대가 한때 자기 것이었던 것을 잃어버렸다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유가 쉽게 설명된다.

철학자 '무질'은 문화 염세주의에 빠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날로 나빠지고 어려워지고 병들고 위험해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냥 자세히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 새로운 것만이 아니라 기존의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문화를 대표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세계화의 시대, 우리의 문화적 뿌리는 낯설어졌다.  하지만 어디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면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다. 

기술적 방황에는 종착역만 필요한 게 아니라 출발점도 필요하다.

  '유럽', '민주주의', '정치', '논리학', '윤리', 연극, '우주', '철학', 그리스어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사용되는 이름과 개념의 목록은 끝이 없다.  문화적 다원주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멸망한 고대 그리스 문화의 유산이 침투한 곳은 서양의 언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많은 문화 유산, 사원의 유적과 조각 작품은 물론이고 삶을 바라보는 서양인들의 태도 역시 그리스의 유산에서 자유롭지 않다. 

  삶은 살아야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연구하고 인식하고 설명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신화와 예술 작품, 그리고 그리스의 천재적인 발명품인 철학에서 만나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그 후계자들은 철학을 학문일 뿐 아니라 삶의 형태라고 보았다. 

  철학의 목표는 의식을 갖고 자유롭게 사는 것, 외부 상황에도, 지배하는 자에게도, 자신의 근심과 슬픔과 두려움에도 노예가 되지 않는 것, 또한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철학은 삶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철학은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삶의 기술로, 각 개인이 원래의 자신인 인간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변화시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면, '나는 인간으로서 일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라고 생각하라.

  황제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과연 침대에서 일어날 충분한 이유일까? 인간으로서 일한다. 그 이상은 없나? 

  끊임없이 조심하라는 경고가 날아들고, 쉬지 말고 완벽하라는, 열심히 일하라는, 최대한 많은 성과를 올리라는 외침이 귀를 찢는 시대엔 '그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깨닫는 것조차 당연히 많은 품이 들어간다. 

  인간은 결국 철저하게 불완전한 존재이며, 혼란스러운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는 법을 배워야 하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동물 (니체)이다.

  아우렐리우스 같은 인생의 기술자들은 우리의 불완전함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최고의 성과를 이루라고 격려한다. 

  인생이라는 밀림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풀어야 하는 문제로 보지 말고 우리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실험으로 생각하라고 독려한다. 

  그럴 수 있으려면 외부에서 안전과 확신을 구하지 말고 내면의 확신, 다시 말해 정신의 자유를 평생토록 연습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기원전 4세기에 융성했던 스토아학파의 학설, 특히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게르만족과 힘들게 싸우는 동안 아우렐리우스가 매일 잊지 않고 기록하였던 깨달음과 경고와 원칙들은 그리스 철학 중 가장 생명이 길었던 스토아 이론의 총정리라 보아도 무방하다. 

  《명상록》은 원래 책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었던 기록이기에 그 내용은 글로 쓴 독백이나 일기장보다는 자신과의 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전쟁의 와중에서 자신과 삶의 목적을 잊지 않으려는 수단으로 말이다.  위험과 불확실성의 시간을 겪으면서도 아우렐리우스는 상담가나 심리 치료사를 원하지 않았다. 

  종이 한 장과  필기도구 하나면 족했다.  글쓰기는 두려움 때문에 미치지 않고 그 순간에 충실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명상 훈련이었다. 

  덕분에 그는 임박한 위험과 거리를 취하고 세상을 우주의 관점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종교의식, 폭풍우와 맑은 날을 개의치 않는 무한한 항해, 세상에 태어나 더불어 살다가 죽는 사람들의 천태만상을, 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라. 

  지나간 세대들, 또 다음 세대를 살아갈 사람들의 생활 그리고 현재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야만인들의 생활을 생각해 보라.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잊게 될 것인지, 또한 지금 당신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얼마 안 가서 어떻게 당신을 비방할지 생각해보라. 

  그러면 후세의 명성이나 평판,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아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머리를 차갑게 유지할 수 있었으며 (...)

  바깥세상의 어떤 대상이 네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 너를 불안하게 하는 그것 탓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너의 판단 탓이다.

(……) 

  자신을 더 높은 질서의 일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세상을 원자의 혼란으로 보거나 정돈된 전체로 볼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자연의 지배를 받는 전체의 일부는 사실이다 동시에 나는 나와 동일한 모든 일부들과 필연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우렐리우스는 확신한다. 운명의 장난도 두려움도 타인의 의견도 인간이 인간이 되는 것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말이다.

  바깥 세상에서 오는 그 무엇도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없다. 

  사물이 선하거나 악한 건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에픽테토스의 뜻을 이어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비판적으로 캐묻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면 자동적으로 자기 인생의 성공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에 집착한다면 삶의 노예가 될 것이다. 

  자유와 확신을 우리 안에서 찾지 못할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바깥세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명상록》의 모든 구절은 외부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는 단 하나의 진정한 퇴각처인 지성을 절대 잊지 않고서 마음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 생각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성과 덕을 추구하고 소유 대신 존재에 집중하는 것, 이것은 스토아학파만의 인식이 아니다. 

  (동양의 사상가들이나 고승들이 서양의 스토아학파 철학자들과 직접 만나지는 않았겠지만) 중국 고대 사상이나 불교 경전에서도 비슷한 내용들을 찾을 수 있다. 

  이 옛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발굴하여 우리 시대에 활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동서양의 철학 전통이 만나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이 세계화 시대에 말이다.

  스토아학파의 가르침 중에서 어떤 내용을 우리 인생 여정에 지참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우리의 기술적 방황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첫째,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게 느낄수 있다는 자각이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확고한 믿음으로 우리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교류를 나누면 된다.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현존의 목표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면 자신의 운명을 정할 수도 없다.

  자신을 알려면, 인생 목표를 알려면 친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  '

  그렇지만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난단 말인가? 결과와 효율성만, 다시 말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만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 여행에 지참해야 할 두 번째 깨달음이다.

  목표에 도착하는 속도보다는 언젠가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길을 되돌아보라. 

  아마 그 길에서 가장 재미있고 풍성했던 것은 에움길과 샛길이었다는 사실을, 신 나게 달리지 못했던 길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런 길들이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판단과 가치관에 윤곽을 부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인생의 의미는 위기와 실패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 실험이나 연습이라면 한계에 대한 의식을 키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는 자신이 불완전하고 상처 받기 쉬우며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 세상의 비밀이 우리의 인식 가능성보다 훨씬 다채롭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유한성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우주 순환 질서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이 선한 삶, 진정한 삶을 살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럴 때에만이 매일매일 우리는 현재를 살 것이며, 매 순간을 마지막 순간인 듯, 또한 첫 순간인 듯 살 수가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이 우리가 세상에서 만난 첫날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모든 것이 낯설고 감탄의 연속일 것이다.  홀린 듯 만물을 탐구하느라 나쁜 습관을 키우거나 가치 있는 것을 당연하고 짐스럽다 무시할 여력이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끝없는 기적에 감격하느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돈이 없다 한탄하지도, 파트너에게 잔소리를 하지도, 밤새 왜 내 인생은 이 모양 이 꼴인지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으로 세상을 구경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것이며 끊임없이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 여정에 지참할 수 있는 네 번째 지혜다. 

  멋진 인생은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고개를 쳐들고 기다린다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 발로 찾아 나서서 얻는 것이다.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어야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그래야만 불완전함과 나란히 인간의 위대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재능을,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재능을 위대한 인생 실험이 결국 성공할 것이며, 언젠가는 수많은 경험으로 더욱 풍성해져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꺾지 않는 재능을. 아직도 우리는 주저하며 돛을 올리지 못한다. 

  아직도 우리는 탐색하기보다 기다리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페넬로페가 낮에 짰던 수의를 밤마다 다시 풀 듯 보다 적극적으로 삶에 임하자는 냉철한 계획을 매일 다시 내던진다. 

  하지만 페넬로페와 달리 우리에겐 그럴 이유가 없다. 

  같은 자리에 주저앉아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있나 살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인생은 길지 않다. 

  어느 날 항해자가 문을 두드리며 같이 배를 타고 떠나자고 말하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내가 먼저 뛰쳐나가 뜻 맞는 동지들을 끌어 모아야 한다. 

  생각처럼 그렇게 힘들지 않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각자 다 다르지만 모두가 세계국가의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모두가 정신적 자유의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자유인으로 태어난다.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인 사람은 없다. 

  노예가 되는 건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자유가 두려워 스스로를 가둔 사람이다.  노예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라. 

  그리고 힘을 모아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생을 새롭게 발견해보자. 

  용기와 호기심으로 재 무장하여 ...

주:) 
  상기에 나오는 글 내용은 레베카 라인하르트가 쓴 ' 방황의 기술 ' 중 일부 내용임을 밝힙니다. 

 

 

   new mankind